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카가 요시미츠 (문단 편집) === 명과의 [[감합무역]]과 [[천황]] === 요시미츠는 [[중국]]의 [[명나라]]에 관심이 많다 못해 일종의 '숭명' 기질이 있었던 듯한데 어느 정도였냐면 역병이 돌아 메이토쿠(明徳) 연호를 바꿀 때가 되자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홍무제([[주원장]])의 연호인 '홍무(洪武)'에서 한 글자인 '洪'을 일본의 연호로 삼자고 [[천황]]에게 억지를 부렸을 정도였다. 이는 다른 조정 신하들에게 '홍수(洪水)'를 연상시키는 단어라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바뀐 연호는 오에이(応永). 덧붙여 이 연호는 일본 역사에서 일세일원제가 확립되기 전에 제일 길게 사용된 연호(1394년 ~ 1427년)다.[* 1419년 [[세종(조선)|세종대왕]] 때의 '대마도 정벌'을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른다.] 무려 34년이나 되어 [[쇼와 시대|쇼와]], [[메이지 시대|메이지]] 다음으로 길며, 요시미츠가 죽은 뒤에도 20년간 더 사용되었다. 남북조가 통일되기 전부터 요시미츠는 명과의 통교를 바라고 있어서 명에 사신을 보냈으나 명나라는 당시 일본의 정식 무역 대상을 북조나 막부 정권이 아니라 남조를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던 데다가 천황을 일본의 왕으로 보고 쇼군과 막부 정권은 모두 천황의 신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왕의 신하를 무역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같은 이유로 [[청나라]]는 현 [[베트남]] 남부에 있던 [[응우옌씨 정권]](광남국)의 책봉 요청을 거부했다.] 요시미츠는 이후로도 줄기차게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무역 좀 하게 해 주세요]]'라고 [[징징]]댔지만 잘 되지 않았다. 요시미츠가 출가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출가를 하면 천황의 신하 자격이 아니라 자유로운 입장이 되기 때문이라고. --태정대신 직을 받긴 했지만.--[* 출가한 뒤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으로써 이국과의 교역에 나선 것은 이미 요시미츠 이전에 헤이안 시대 말기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그런 적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1401년에 명에 사신을 파견하자 명 황제 [[건문제]]는 요시미츠를 '''[[일본국왕]]'''에 책봉하여 양국은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고 [[감합무역]]을 1404년부터 개시했다. 당시 조정의 귀족들은 천황을 두고 국왕에 책봉된 이 상황에 대해 불만을 품었지만[* 요시미츠가 막부의 문무백관을 거느린 채 명나라 사신에게 세 번 절하고 무릎을 꿇은 채 황제의 조서를 받는 퍼포먼스는 오랫동안 대외관계에 담을 쌓아왔던 일본인들에게 굉장히 굴욕적인 광경으로 비쳐졌다.] 워낙 요시미츠의 권한이 막강했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